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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서 빈둥빈둥

meet the Modern Seoul : 서울 서대문-정동

by 거지이모 2017. 3. 11.

간단하게 커피 한 잔 마시고 <현대건축의 아버지 르 코르뷔지에 : 4평의 기적>을 보려 가려고 하는데, 먼저 갔던 사람들 소식이, 엄청 기다린다고 한다. 그들도 한 시간 정도 기다렸다고.... 예술의 전당까지 갔다가 기다려서 관람하고 공항가려면 비행기 놓칠 것 같아서 그냥...

 

 

 

2017년 3월 11일 토요일   서울 현저동

 

 

충무로에서 3호선으로 갈아타서는 어느 방향으로 갈까 잠시 생각을 하다가.

 

 

 

 

모화관(慕華館)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지은 것이고 그를 영접하기 위해 지은 것이 영은문(迎恩門)이다.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조선의 국왕이 이곳 모화관까지 직접 행차하여 영접하고 한양에 들어가기까지 7번의 공식 연회를 베풀었다고 하니 그 시절 조선의 지식인들 눈엔 영 고까운 것임에 틀림없다. 그라하여 청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의지로  모화관과 영은문이 있던 이 곳에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딴 독립문(獨立門)을 세웠다.

 

 

 

 

서재필이 초빙한 건축사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Середин-Cабатин) 설계, 토목은 한국인 건축기사 심의석.

 

 

 

 

지긋지긋했던 중국, 그리고 어떻게든 뺏아먹겠다고 달려드는 서구 열강과 일본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의지의 천명으로 시작됐고, 그 열망으로 한푼 두푼 성금으로 모은 3825元(8월까지 모금액 총 5897원19전2리)으로 1897년 11월 20일 준공됐다.

 

 

 

 

당시엔 태극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일반 백성들은 몰랐기 때문에 여기 와서 이걸 보고 베껴 그리기도 했단다.

 

 

 

 

왜 아치 부분만 벽돌일까.

 

 

 

 

정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여기 있겠지?

 

 

 

 

"오늘 우리는 국왕이 서대문 밖 영은문의 옛터에 독립문이라고 명명할 문을 건립할 것을 승인한 사실을 경축하는 바이다. 우리는 그 문의 이름이 국문으로 조각될지 알지 못하지만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중략) 이 문은 다만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러시아로부터, 그리고 모든 유럽 열강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조선이 전쟁의 폭력으로 열강들에 대항해 승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조선의 위치가 극히 중요해 평화와 휴머니티와 진보의 이익을 위해서 조선의 독립이 필요하며, 조선이 동양 열강 사이의 중요한 위치를 향유함을 보장하도록 위치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것이다. 전쟁이 그의 주변에서 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의 머리 위에서 쏟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힘의 균형의 법칙에 의해 조선은 손상 받지 않고 다시 일어설 것이다. 독립문이여, 성공하라! 그리고 다음 세대로 하여금 잊지 않게 하라."

서재필이 『인디펜던트(Independent)』에 기고한 글이라고 하는데, 불과 13년 뒤에 경술국치를 맞을 줄은 몰랐겠지. 하지만 그의 생각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주말이라 가족 단위로 와서 스케이트도 타고 뛰어 놀기도 하고 자전거도 타고 이 와중에 포교활동도 열심히 하시고들. 거지이모처럼 걍 하릴없이 멍 때리기도 하고..... 120년 전 근대인들은 이 곳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말 조선이 그들이 바람처럼 혼돈의 시간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을 거라 믿었을까? 엄습해오는 불안 속에서 희망을 품었을까..

 

 

 

2017년 3월 11일 토요일   서울 정동

 

 

독립문을 뒤로 하고 길 따라 슬슬 걸어 정동에 도착했다. 김수근이 설계한 경향신문사 사옥(舊 문화방송 정동사옥).  상부 창의 형태가 텔레비전 브라운관을 본따 만든 거고, 내부도 방송국 용도에 걸맞게 두 개층을 관통하는 빔이 노출되어 있다거나 방음을 위해 벽체의 두께가 남다른 것 등등의 특징, 그리고 송출탑까지. 더 자세한 내용은 여기

 

 

 

 

한성중화기독교회. 1912년 화교들을 위해 설립됐다고 한다. 길 건너 경향신문사 자리엔 러시아 정교회가 있었단다. 종파가 달라도 같은 신을 믿으니 사이좋게 지냈겠지?

 

 

 

 

1965년에 준공된 정동아파트. 당시 아파트는 근대화와 계급의 상징이었으니 상류층이 다수 거주했던 곳. ㄱ자의 복도형, 36세대로 구성되어 있다.

 

 

 

 

우의정 건축가가 설계한 이화정동빌딩. 근대 건축의 집합체인 정동에 맞는 재료의 선택과 입면이 주효한 것 같다. 오픈하우스 때 가고 싶었는데 시간이 안 맞아서. ㅠㅠ

 

 

 

 

舊 러시아 공사관. 한국전쟁으로 소실되고 지금의 3층 전망탑과 외벽 일부만 남았다. 독립문의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Середин-Cабатин)이 설계했는데, 지대가 높은 상림원에 자리잡았기에 서울 시내, 특히 궁궐 내부를 훤히 볼 수 있었다. 얘네들이 이런 곳에 이런 걸 지은 이유는 뻔하겠지.

 

 

 

 

1969년에는 보존 여부를 두고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덕수궁에서 이곳까지 이르는 길을 "고종의 길"이라며 복원한다고. 일본의 감시를 피한다는 데가 고작(?) 러시아 공관, 그것도 궁녀의 가마에 몸을 숨겨 도망가야 했던 고종의 참담함이란..

 

 

 

 

고종은 아관파천 이후 대한제국을 선포했지만..

아무리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인조 이후 봉림대군이 아니라 소현세자가 뒤를 이었다면....? 그랬어도 조선의 운명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장성한 동생과 어린 아들, 어디서 많이 보던 모양새긴 하다. 게다가 이후 지긋지긋한 예송논쟁을 일으켰던 신하들이 줄줄이 눈에 불을 켰을테고..

 

 

 

 

이화여고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심슨기념관(Simpson Memorial Hall)은 1915년 준공된 이화여고에서 제일 오래됐고 한국전쟁 때 붕괴된 걸 복구-복원을 거쳤다.

 

 

 

 

포인트가 비슷.

 

 

 

 

舊 신아일보 별관, 1930년대 당시로서는 민간건축물에 잘 사용되지 않았던 RC조 사용. 지상3-4층은 훗날 증축.

 

 

 

 

버려진 라디에이터? 첨엔 벤치인 줄 알았지.

 

 

 

 

1897년 건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정동제일교회. 독립문에도 관여한 건축가 심의석이 미감리회 교회확장국(Board of Church Extension)에서 발간한 1894년판 <교회설계도안집>의 25번 도안에 기초하여 들여온 설계도에 맞춰 시공했다고 한다(구한말 외국인의 공간 : 정동). 근대 문물은 교회와 학교를 중심으로 전해지기 시작했으니 당시로선 꽤나 힙한 거리였겠지, 이곳은?

근데 경찰들이 이곳까지 들어와 교통을 통제하는 거 보면, 시청앞에서 집회가 있나보다.

 

 

 

 

그러거나 말거나 평화로운 덕수궁 돌담길.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그렇게 쓰라고 있는 태극기가 아닙니다.

 

 

 

 

1박2일의 서울 나들이가 끝이 나고 이제는 섬人의 정체성도 조금은 가질 때가 되지 않았나 싶지만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육지人은 이제 돌아가 산적한 과제를 해결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