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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서 빈둥빈둥

비우러 가는 길 : 우리동네 산천단

by 거지이모 2019. 6. 25.

지난 여름 떠나오면서 미처 짐을 가져오지 못한 상태인데 계약기간은 끝나가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 궁리하다가, 이사업체를 알아보니 이건 뭐.. 더구나 책이 좀 많이 있어서 견적이 예상보다 많이 나와서 아빠한테 부탁해서 차를 가져가서 실어오기로 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아빠랑 단둘이 2박3일 나들이를 하게 됐네?

 

 

 

2018년 12월 14일 금요일   울산-여수-제주

 

 

출근할 때 간단하게 짐 챙긴 뒤 퇴근하고 아빠랑 옥동 법원사거리에서 만나 여수로 곧장 이동했다. 여수산단의 불빛, 그리고 기름내를 맡으니 흡사 울산 같기도 하고 뭐 그랬다.

 

 

 

 

여수항에 오니 선적하기 위해 대기하는 트럭이 어마어마하게.... 일반 승용차는 따로 들어간다 해도 생각보다 시간 많이 걸리더라고. 차를 넣어두고 터미널에서 기다리는데 단체관광객이 많더라고. 싸게 갈 수 있는 비행기도 많은데 왜 여기서 배를 타실까 싶은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대부분이었다. 힘드실텐데 싶다가도 뭔가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크긴 크더라.

 

 

 

 

아빠는 주무시고 낮에 커피를 많이 마신 관계로 어르신과 대화를 하려고 했는데, 불길했던 예감은 틀리지 않아.. 식당에서 노래 부르고 휴게실에서 술 마시고 떠들고.. 어휴.... 헤드폰의 불륨을 올려봤자 소용이 없더라. 갑판으로 나가니 바닷바람에 얼어죽을 것 같고. 무슨 음주가무 못하다가 죽은 귀신들이 씌었나 새벽까지 사람 미치게..

 

 

 

2018년 12월 15일 토요일   제주항-산천단-비자림-성산읍-하도리-제주시

 

 

서서히 밝아오길래 나갔더니 한라산이.. 매번 비행기 타고 가다가 배 타고 가니 새롭다.

 

 

 

 

차 가지러 가신 아빠를 기다리면서 보니까 어쩐지 이국적인 풍경. 새삼 처음 제주공항에서 나올 때가 생각나네.

 

 

 

 

차 타자마자 바로 달려갔다, 최애 해장국 먹으러! 유명하다는 해장국은 거의 다 다녔지만 최근 1년 동안 꽤나 드나들었던 대춘 해장국. 아빠가 안 계셨다면 간만에 한라산 한병 깠을텐데.. ㅋㅋ

 

 

 

 

자취방에 들러 목욕재계하고 아빠랑 어딜 갈까 하며 중산간을 지나다가 역시 만만한 비자림을 가기로 했다. 그 전에 오름 하나 가자하여 거지고모가 아는 한 제일 낮은 아부오름을 갔는데, 몇 년 전에 왔을 땐 걍 도로에 차 대놓고 그랬는데, 주차장도 정비되고 입구도 달라졌드라.

 

 

 

 

거지이모 한정 10분이면 오르는 정상. 한라산이 이렇게 깨끗하게 보이는 날이 몇 안 되는데 운이 좋았다.

 

 

 

 

동부 쪽은 360도를 돌아 보면 한라산과 각종 오름, 바다, 저 멀리 일출봉도 다 보이고 하는데.. 이제 제2공항 생기면 그런 경관은 끊기겠지. 환경파괴도 따라 오고 말이야...

 

 

 

 

토욜인데 사람이 별로 없던 비자림. 날이 추워서 그런가..

 

 

 

 

한적한 비자림을 걸어서 좋았다. 공기도 상쾌하고 간간히 부른 바람도 기분좋을 정도고.

 

 

 

 

 

 

 

 

이제 여길 걷는 것도 마지막이겠다.. 근데 그 마지막이 아빠랑 처음이라 다행이야.

 

 

 

 

성산일출봉을 보며 커피 한 잔 하려고 했는데 자리가 없어서.. 그래도 아빠 자리에선 온전히 보인다며..

 

 

 

 

해안 따라 이동하다가 하도리에 잠시 서서 우도와 성산일출봉이 보며 차에서 잠이 들었다. 새벽 내 시끄러워서 제대로 못 잤더니 커피를 마셨어도 눈이 막 감기더라고. 어젯밤부터 몇 시간씩 운전하신 아빠도 좀 쉬시고..

 

 

 

 

마지막으로 인사하고 가려고. 선배님 후배님을 만나기 위해 벽화에서 대기. 진짜 시청에서 만난다고 하면 십중십은 벽화 앞에서 만나는 거지. 첨엔 왜 학교 앞을 놔두고 시청에서 술 마신다, 저녁 먹는다 하는지 의아했는데, 휑한 정문 앞을 보고 파워 납득.

 

 

 

2018년 12월 16일 일요일   제주-여수-울산

 

 

엊저녁에 정리해 둔 짐을 아침에 차로 나르는데 와, 엘베없는 4층의 고단함이라니.. 계단을 얼마나 오르내렸던지 다리가 후덜덜.. 그래서 점심은 산방식당 밀면과 수육으로!

 

 

 

 

제주공항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려는데 제주 한정 아메가 있네? 언제 이런 게 있었나 싶은데, 왜 몰랐지? 나중에 알고 보니 올 4월 출시였던데 항상 제주 한정 메뉴는 거지고모가 마실 수 없는 종류라서 얼른 마셔봤는데.. 케냐 원두라서 산미가 더 풍부해짐.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출항을 기다리면서 제주시를 보는데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뿜어져 나왔다. 그동안 꾹꾹 참아왔던 거, 더 참지 못한 거.. 그리고 미처 깨닫지 못했던, 지난 수 년간 함께 지내왔던 사람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나서...

 

 

 

 

제주를 떠나가는 배 위에서 제주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며, 7년 전 다짐했던 그 마음을 상기하고 앞으로는 육지에서 잘 살아보자고 계속 되뇌이며 작별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