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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서 빈둥빈둥

이제는 육지인 I : 성산읍

by 거지이모 2019. 12. 10.

왜 하필 지금인지 모르겠다. 그냥 지금쯤이면 괜찮을 것 같았고 지금이 아니면 못 갈 것 같았다. 다 잡은 알았던 거지이모의 마음은 일을 그만 둔 후에 다시 한번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또 다른 일에 몰두하니 조금씩 제 자리로 돌아가는 거 같아서 용기를 냈다.

 

 

 

2019년 10월 24일 목요일   부산-제주

 

 

저가항공사로 제주가는 비행기 값이 싸졌다고는 하지만, 결국 주말이나 공휴일에 오가기 때문에 항상 왕복 20만원 정도가 들었다. 이젠 자유인이 되어 평일 오후 제일 싼 좌석으로 가게 됐다. 서울-부산 KTX 타느니 서울-제주-부산 비행기가 더 싸다며 평일에 시간으로 돈을 아끼던 친구가 생각나네. 덕분에 거지이모도 그 방법 요긴하게 써먹기도 했지. 암튼 느즈막히 떠나는 섬 나들이.

 

 

 

 

언제부턴가 바다를 보면 꼭 감옥에 갇힌 것만 같아 되도록 중산간을 지나는 버스를 타곤 했다. 고도 차이가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바다가 보일 때가 있지만.. 암튼 빨리 가는 걸 두고 굳이 교래로 둘러가는 버스를 탔다. 산 속에 있다가 갑자기 넓은 들판으로 쏙-하니 빠져 나오는 기분이 좋단 말이지.

 

 

 

 

도착하자마자 짐부터 정리하고.

 

 

 

 

물이랑 간단히 먹을 걸 사기 위해 편의점으로 가는데, 마당에 불이 훤히 켜져 있네. 내부 전망이 아니어서 다행.

 

 

 

2019년 10월 25일 금요일   성산읍-이도동

 

 

기숙사나 원룸  살 때 아침마다 보는 변함없는 풍경인데, 그 땐 새가 우는 것도 짜증나던데 ㅋㅋㅋㅋ 놀러와서 그런가 한없이 평화롭고 여유로운 아침을 맞이 하네.

 

 

 

 

 

사놓고 책장 속 저 아래에 숨겨져 있던 책을 굳이 제주까지 꺼내와 읽어본다. 다 읽고 가야 할텐데.....?

 

 

 

 

서귀포로 가서 대리님을 만나 같이 제주시로 넘어와 시청에서 오랜만에 오겹살에 소주 한 잔 했다, 동네마다 있는 그때 그집. 거지고모가 떠난 그 새 한라산 17년산이 나왔더라고. 거의 한 1년 반만에 마시는 소주지, 아마? 기분좋게 마시니까 정말 달달하게 술술 넘어가더라. 시장이 반찬이듯 역시 최고의 안주는 사람과 나누는 마음 실상은 오겹살인가봐.

 

 

 

2019년 10월 26일 토요일   성산읍-노형동-아라동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침대 속을 굴러다니다가 일출봉을 보며 동네 마실.

 

 

 

 

 

오픈 전 일등으로 도착해서 기다려 먹은 가시아방 고기국수.

 

 

 

 

국수 한 그릇을 싹싹 비우고 나니 배가 너무 불러서 해안 따라 광치기까지 걸어가기로 한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이 잔잔하게 느껴지는 건 개뿔, 무슨 돌풍이 불어대서 숨도 못 쉴 지경. 이미 식도까지 차올라서 안 그래도 거친 호흡이 점점 더... 들숨에 숨막히고 날숨에 토할듯한 거지고모.

 

 

 

 

제주도라고 좀 한적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말님들이 쉬고 계심. 그래서인지 걸어가는데 온데 말똥.

 

 

 

 

오늘은 어쩐 일로 경사 12도가 넘는데도 사뿐사뿐 걸었다.

 

 

 

 

성산을 베이스캠프로 삼으니 세상 원없이 실컷 보게 되는 일출봉. 여행자의 몸으로 오니 세상 아름답다.

 

 

 

 

이번 나들이를 통해 최애 숙소로 등극.

 

 

 

 

제주시로 가는 버스를 타고 봉개로 넘어가며 바다를 보는데.... 여기 살 땐 창살 같이 느껴졌다고 친구들에게 토로했는데.. 부산바다 제주바다 뭐가 다르다고 그랬을까.

 

 

 

 

거지고모 최애 중 하나인 카페 901.

 

 

 

 

바나나를 중심으로 잘 정렬된 견과류와 곡물류들. 역시나처럼 슥슥삭삭 한 그릇 다 비우고 나서.

 

 

 

 

당근 썰기에 여념이 없으신 사랑하는 알바님.

 

 

 

 

기다렸던 회원님을 만나 무화과 샐러드에 뱅쇼를 마시며 못다한 지난 이야기로 열을 올렸다. 한참이나 어린 동기님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거지고모의 정신연령이 어린 건지 이분들이 또래보다 의젓한 건지.. 다만 거지고모를 배려해 주는 마음 씀씀이가 고마운 건 분명하다.

 

 

 

 

한 때 같은 아라동주민이었던 인연을 내세워, 아라동 바삭에서 즐겨먹던 김치나베를 먹고, 무한확장 중인 에이바우트에서 커피로 입가심을 하며 또 하루를 보냈다.

 

 

 

2019년 10월 27일 일요일   성산읍-남원읍

 

 

제주를 올 게 아니라 뉴욕을 갔어야 한 게 아닌가 싶은 4일차 아침.

 

 

 

 

1학년 헤메던 시절부터 거지이모를 잘 챙겨주던 사랑하는 진짜 서귀피안 동기님과.

 

 

 

 

어디를 찍어도 이쁘게 나오던 카페였다. 인스타 보면 사람들 많던데 오늘따라 신기하게 별로 없더라. 덕분에 목에서 피나게 대화를 나눴다. 떠나온 시간만큼 쌓여있는 이야기. 아무리 SNS가 있다고 해도 만나서 얼굴보며 대화하는 것만 못하다는 걸 새삼 확인했다. 한 템포 쉴 때마다 우리 반대편 좌식 테이블에 있던 엄마아빠랑 온 아기가 너무 귀여워서 힐끔힐끔. 태평양 건너 계시는 조카님 두 분도 보고 싶네. ㅠㅠㅠㅠ

 

 

 

 

 

가시아방 건너편에 있는 타쿠마. 제주고등어(사바)동은 처음이라 시켰는데 비리지도 않고 맛있었다. 그저께부터 불붙은 한라산 17년산 시켜서 순삭시켜줌.

 

 

 

 

밤마실 나온 남원에서 카페 이피엘. 위미에는 시스베이글이랑 라바북스 뿐이었는데 언제 이렇게 으리으리한 카페도 생기고 거대거대한 호텔도 생기고.. 고즈넉하고 차분하지만 복작거리는 조용한 마을이 제주에서 자꾸 사라져 간다.

 

 

 

2019년 10월 28일 월요일   성산읍-오라동-1100도로-중문-성산읍

 

 

오늘은 누구도 만나지 않고 조용히 쉬는 날. 아침부터 빨래를 돌리며 아직도?! 다 못 읽은 책을 폈는데.. 현실은 월시 보느라 빨래며, 책이며 뒷전. 삼다수에 버무린 커피 마실 생각도 잊었다. 게릿 콜의 FA 대박투를 보며 진작에 떨어진 다저스 생각 뿐. 아! 커쇼! ㅠㅠㅠㅠ

 

 

 

 

미리 신청해 둔 스타벅스의 커피 세미나. 두 가지 원두를 두 가지 추출법으로 내려준 커피와 디저트를 맛보았다. 유당불내증인 거지고모는 언제나 아아나 자허블, 망블만 마시고 디저트는 아오안인데, 스콘이랑 아이스크림 조합은 개꿀맛! 다만 HOXY 몰라 락토즈 캡슐은 필수요소.

우리의 시음을 도와주신 파트너 분도 육지에서 오셨더라고. 제주 생활의 어려움에 서로 공감하며 얘기하는데, 그래. 제주시에 살던 거지고모도 힘들었는데, 섬 끄트머리 성산에 사니 얼마나 지루할 거여! 글쿠 스벅에서 샷 길게 추출 안 해주던데 본사 방침이냐고 물었더니 그렇지 않다며 요청하면 언제든 가능하다고 하셨다. 이 얘기 듣고 가는 곳마다 요청했는데 아무도 안 해줌, 아마 커피 머신을 다룰 줄 몰라서 그런 것 같음.

 

 

 

 

시간도 남아 도는데, 거지이모의 특기 버스타고 섬일주 도전! 진짜, 이렇게 여유 있을 때 버스타기나 다시 해볼까? 부산-서울, 부산-광주-서울, 부산-강릉-서울 요롷게 해봤으니 강릉-광주만 남았네. 아! 가로 세로로 영덕-보령, 춘천-진주도 해볼까? 엄니가 들으면 "정신 나갔네, 나갔어."라고 하시겠지.

 

 

 

 

제주시 터미널에서 240번으로 갈아타고 노형을 지나는데 더 더  솟아오른 드림타워. 이제 이게 준공되고 나면 안 그래도 헬게인 노형오거리는 본격 지옥불이 될 것인가.

 

 

 

 

이제 막 단풍 시즌이 들어가려는 한라산. 7년을 넘게 살면서 한 번을 안 갔네. ㅋㅋㅋ

 

 

 

 

일부러 찾았는데 다팔려서 문 닫았네.

 

 

 

 

서귀포시 터미널에서 201번을 기다리는데, 살짝 보이던 월드컵 경기장. 7년을 넘게 살면서 한 번을 안 갔네. 왜 이렇게 안 한 거 투성인가. 축구 말고 야구팀 하나 생기면 안 될까? 그랬으면 시즌권 끊어서 갔을텐데.. 하지만 태풍이 잦으니 여름 몇 달은 홈경기가 없을 건가.

 

 

 

 

일부러 찾았는데 휴일이라 문 닫았네.

오늘은 이런 날이었어.